애처로운 박애주의자

그대는 안정된 계급과 좋은 가문이라는 갑옷을 걸치지 못한 채로 태어났습니다
보호해 줄 외투가 되어줄 배우자는 일찍 저 세상으로 가버렸구요
속옷 하나 걸친 채 어린 두 딸을 이끌고 여기까지 살아 오시느라 애쓰셨어요
'나' 라는 존재, 내 감정따위는 생각할 겨를 없이 살아서,
지금 자신이 아픈지 슬픈지 모르고 계셨어요
이유없는 매를 맞고도 자신의 잘못인듯 머리를 조아렸어요
상처가 나서 피가 나고 있는데 그냥 아프다고 생각했을 뿐,
외로움과 고독으로 어지러웠던 것을 밥먹은 게 소화가 안되어 속이 미식거리는 것이다 하셨지요
오른쪽 새끼 손가락의 중간 어디쯤 통증이 생겼는데, 아무리 더듬어봐도 고통의 그 지점을 찾지 못하셨어요.
당신과 그대의 두 딸은 당신이 안아주지 않으면 생살로 거리를 맞이해야 했어요.
누군가에게는 시원한 바람이었을.. 봄날의 햇살도 그대에게는 오도가도 못하는 겨울의 한 가운데 같았을 거예요.
2.
그대, 14살 꿈많던 자신이 원망스럽다 하셨어요.
그러나 과거의 나와 화해하고 지금의 나를 만나야
미래의 내가 나를 만나러 올거예요.
과거의 내가, 어느날 찾아와 말을 걸어 올 때
외면하지 마시고 친절하게 맞이하고 또 잘 보내주세요.
이제는 그대, 자신을 만나 비로소 마음껏 사랑하여 주세요.
힘줄이 꼬여서 쫓기어 뛰기 전에는 걷기는 힘들다 하셨어요.
사랑받길 간절히 원하는 그대 안의 그대를 만나기 위해
임 만나듯 가야할 때
발목부터 무릎까지 새 힘을 얻게 되시길 간절히 빌어 볼게요.

밤의 기억

노래한다.
노래한다.
너에게 노래한다.
바닥에 고여 있는 물 위에 나의 노래를 흘려보낸다.

넌 날 버리고 떠났다.
바닥에 넘어져 일어나기도 전에
넌 그 길을 떠나버렸다.

사라지고 말았다
흔적이 없는데
존재도 없어졌다.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실제 일어났었던 일이었을까..
꿈이라면 좋았을 것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어야 할텐데...

해는 지고 어두워졌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낙옆이 흩어지고 있다.

집으로 가는 버스
날 떠난 뒤
넌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날 잡아끌고 있는 것은
나이지, 너는 아니다.

그날 너에게 전화를 걸지 말았어야 했다.
마지막을 품위있게 마무리 지었어야 했다.

불면의 밤을 끝마칠 수 있을까..
길을 걷다가 흙탕물에 넘어졌다.
그냥 누워 잠을 자는 게 나을 뻔 했다.

차라리 기다렸다 하지 말 걸

그 꽃이 시드는 날
너에게로 달려가볼게
내게 안겨 준 그 꽃이 이별의 꽃이라 말하여도,
내겐 희망이 되고
창가에서 말라갈 지라도, 그 꽃말은 사랑일거다.

꽃이 어느날 말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직 너에게로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창가에 서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고.

우연히 찾아온 길 모퉁이에서
그를 만날 날
여태껏 기다려온 보람도 없이,
그저 빈 옷자락만 날리고 있구나

차라리 기다렸다 하지 말 걸 그랬다.
이제와 소용없는 말은 하지 말 걸 그랬다.
생기 없는 빈 껍질로, 다가서면 부스러질 분홍 잎이라 할지라도

어찌나 널 기다리며, 어찌나 널 그리워하며
어쨌거나 마지막 숨을 다했으니,
이제는 부스러져 바람에 날릴지라도 차라리 다행이다

찬란한 봄은 어떻게 오나

 깊은 한숨으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빛은 어느덧 어두움이 되겠지만
오늘의 빛은 이미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말았기 때문에
다가올 어두움이
더이상의 비극은 허용하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난 오늘
너를 한껏 믿어보려 한다.
너의 그 크나큰 생명력에 기대어
나의 노쇠함의 우울을 거둬보려 한다.
난 이미 시들고 있지만,
곧 다가올 터질듯한 부푼 가슴
다가오는 빛의 기운을
이미 느끼고 있다.
찬란한 봄이 다가온다
태풍처럼 소용돌이 치며
한껏 달려오고 있다.

인지능력

분명히 어제는 기억이 나고
내일은 기억이 없는데,
오늘을 이끄는 것은 어제가 아니고 내일의 기억이다.
내일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무수히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은 없으나, 난 분명히 인기척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이끄는 구나..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를 이끄는 구나
그러면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나를 이끌었겠구나.
어제의 나에게 지금 내가 대답을 해줄수 없듯이
내일의 나는 나를 기다려줄 뿐,
그의 소리가 지금의 나에게는 들리지 않겠지..
다행이다.
이 세상에
혼자 덩그마니 떨어져 점처럼 찍혀진 내가 아니라
어제를 이끌고 내일로 가는 내가,, 아니 우리가 기차처럼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 것을..
어제의 나에게 힘을 주고, 격려하는 습관을 갖기로 했다.
참으로 영약한 방법이 아닌가..
내일은 우리가 함께 달리는 현실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자.
굿모닝, 굿애프터누운, 굿이브닝, 굿나잇

난 슬퍼요
비가 오지도 않는데
바람이 불지 않는데
마음은 이미 차가워졌어요.
한 끼 식사를 하기 위해
먼 길을 걸어왔어요.
따뜻한 메세지를 전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는데
그는 이미 자리를 떠나버렸군요.
혹시 저에게 남긴
메.세.지.. 가 없을까요

피의 향기

어떤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있다.
그의 옷에서도, 그의 숨소리에서도.
그와 악수를 마치고, 난 내 손을 코에 대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싶어졌다.
그 향기는 그의 생각이,
그의 혈관을 타고 온 몸에 흐른 후,
내 쉬는 한숨일거라 생각했다.
그의 뒤를 밟기로 했다.
그가 남기고 간 한 자루의 볼펜을 재빨리 숨겼다.
그리고 그것을 팔뚝에 박고
내 혈관속으로 그의 향기가 흐르기를 기다려 본다.